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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데 한 번 읽어볼까!?/잡학

줄리어스 시저 : 잊혀진 암살자

by 호기심심풀이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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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 : 잊혀진 암살자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에서 줄리어스 시저가 단상에 앉으면서 로마의 원로원 의원 집단이 그를 살해했다. 시저는 소름끼치는 눈 앞에서 23개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었다. 로마인들이 이달 중순이라고 부르는 대로 3월 이데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관중들은 아직 몰랐지만 로마 공화국의 마지막 시간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탓이었을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죽어가는 시저는 암살자들 중 한 명에게 몸을 돌려 마지막 숨을 거두며 그를 비난했다. 시저의 친구 마르쿠스 주니우스 브루투스였다. "에투, 브루트?"  "너도 그래, 브루투스?"는 셰익스피어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비극>에서 말한 내용이다. 다만 시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브루투스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도 아니고, 그의 가장 큰 배신자도 아니었다. 


최악의 배신자는 다른 남자였다. 알비누스 데키무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먼 사촌이었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이야기에서 빼놓기 때문에, 데키무스는 잊혀진 암살자다. 사실, 그는 필수적인 인물이다.


데키무스는 브루투스나 카시우스 둘 중 어느 쪽보다 시저와 더 가까웠다. 사실 그들은 시저가 내전에서 피비린내 나는 권좌에 오를 때 반대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의 대의로 망명했다. 시저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사면하고 그들에게 정치관직을 보상했지만 그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데키무스는 달랐다. 그는 항상 시저를 위해 싸웠고 그에게 대항하지 않았기때문에 시저의 속에 자리를 잡았다.


데키무스는 로마와 수천만 명의 제국을 모두 지배하는 좁은 엘리트인 로마 귀족에 속했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로마의 통치를 스페인의 대서양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데키무스의 아버지는 평범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혁명에 손을 댔다. 그러자 시저가 함께 와서 데키무스에게 집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데키무스는 그의 생존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을 받았지만 거칠고 야심있는 군인이었다. 데키무스는 "나의 군인들은 나의 관대함과 용기를 경험했다"고 썼다. "나는 가장 호전적인 민족과 전쟁을 벌였고, 많은 거점을 점령하고 많은 곳을 파괴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그의 부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대중을 섬기고, 그의 명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썼다.


데키무스는 위대한 지휘관이자 전쟁 영웅인 시저를 따뜻이 맞이했다. 20대 중반에 데키무스는 로마의 제국에 가울(거의 프랑스와 벨기에)을 점령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시저의 군대에 합류했다. 데키무스는 브리타니 해전에서 승리하여 시저와 함께 알레시아(오늘날의 부르고뉴에서)의 포위전에서 함께 활약하여 로마의 가울 승리를 확정지었다.


후에 로마 원로원에서 그의 적들은 시저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는 반격했다. 내전이 있었고 데키무스는 시저를 선택했다. 다시 한번 데키무스는 바다에서, 이번에는 가울의 지중해 연안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시저가 다른 곳에서 적들에게 가는 동안 시저는 데키무스 총독 대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저는 4년여의 힘든 싸움 끝에 기원전 45년 데키무스를 곁에 두고 의기양양하게 로마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왜 데키무스는 불과 9개월 후에 시저를 상대로 단검을 치켜들었을까?


많은 로마인들은 시저가 축출한 권력을 두려워했다. 이론적으로 로마는 입헌 공화국이었다. 실제로 로마는 수십 년 동안 군사독재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제 시저는 로마 최초의 평생 독재자였고, 이름만 다를 뿐 왕이었다. 그는 심지어 여왕을 자신의 정부인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로 삼기도 했다. 기원전 44년 3월, 그녀는 로마의 변두리에 있는 시저의 별장에서 살았다. 그녀의 어린 아들은 시저의 사생아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이 로마의 전통주의자들에게는 너무 벅찼다. 그러나 정치적 원칙보다는 야심이컸던 데키무스는 시저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데키무스의 편지들은 자유보다는 명예를 더 중요시했던 것을 암시한다. 그는 로마에서의 승리나 형식적인 승리 행렬의 구별을 원했지만 시저는 이를 거부하고 하급 장군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틀림없이 그 독재자는 부하들을 아래에 두기위해 천천히 호의를 베풀기를 좋아했다.


그 후 시저의 젊은 거장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등장했는데, 교활한 정치가일 뿐이었다. 데키무스는 시저의 존경심을 얻은 옥타비우스가 자신을 대신하는 것을 좋아할리가 없었다.


기원전 44년 겨울에. 카시우스는 시저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데키무스나 브루투스처럼 카시우스는 귀족에 속했다. 데키무스와 같은 직업군인이었지만 브루투스 같은 지식인이기도 했다. 행동가였던 카시우스는 브루투스가 움직이도록 영감을 주었다. 브루투스는 군인은 아니었지만 철학자와 웅변가였고 로마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데키무스도 60명 이상의 저명한 로마인들이 그랬듯이 음모에 가담했다.


매복의 과거 명수로서 카시우스는 원로원에서 시저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데키무스는 모든 공모자들 중에서 오직 그만이 시저의 신임을 받았다. 시저는 암살 전날 밤 디너 파티에서 데키무스를 곁에 두기도 했다. 이데스의 아침, 시저는 갑자기 음모설 때문인지 원로원 회의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시저가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음모자들은 데키무스를 시저의 집으로 보내 결국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도록 설득했다. 데키무스는 그의 일을 했다. 그는 독재자의 마음을 바꾸었고 시저는 그 모임에 갔다. 거기서 그는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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