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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항공지식(일반)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by SPECIAL 호기심심풀이 2020.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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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진 여러 나라에서 성능이 좋은 새로운 항공기가 많이 개발되고 세계일주 장거리 비행까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도 그들과 같이 항공기술을 익히려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조종사가 되어 우리나라 항공의 선구자가 된 사람이 바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이었다.


1900년 1월, 서울의 북촌인 평동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3ㆍ1 운동 이후 다니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자동차학원에서 2개월간 운전교육을 받고 난 다음, 꿈에 그리던 조종사가 되기 위하여 1920년 봄 도쿄에 있는 고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였다.


6개월 과정의 조종교육을 이수한 안창남은 다음해 5월 일본에서 최초로 실시된 제1회 조종사 면장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함으로써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조종사가 되었다. 이때 응시자는 모두 17명이었는데 한국인은 안창남 한 사람이었고, 합격자는 두 사람뿐이었다.


그후 안창남은 뛰어난 조종기술을 인정받고 그가 졸업한 고구리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1921년 6월 지바에서 열린 비행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하여, 무시험으로 1등 조종사 자격을 취득했다. 또 안창남은 1922년 11월, 일본 비행협회가 주최한 우편비행대회에서도 최우수상을 받아 또다시 조종기술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과시했다.


이와 같은 쾌보가 우리 국내에 널리 알려지자 온 국민은 축제 분위기에 들뜨게 되었고, 동아일보사에서는 1921년 10월 종로 YMCA 강당에서 국내 유지들을 모아 “안창남 군 모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192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모국방문비행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안창남은 이때까지 자기소유의 비행기가 없었다. 그래서 모국방문을 위해 쓸만한 비행기를 빌려 쓰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고구리 비행학교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뉴포드란 영국제 고물기(1인승 90마력 복엽기)를 대여 받았다.


이 고물 비행기를 빌린 후 안창남은 여러 가지 부속품을 갈아 잘 날 수 있게 손질한 후 “금강호”라고 명명하고 동체에 한반도 지도를 그려 넣고 배에 실어 고국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기다리던 12월 10일, 여의도 비행장에는 5만여 인파가 몰려들었었는데 철도국(철도청)에서는 임시열차까지 운행하고, 경성(서울) 시내 전차는 거의 다 동원되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화려한 개회식이 끝나고 12시 22분, 안창남의 비행기 금강호는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힘차게 떠올랐다. 200m 이상 상승한 다음 남대문을 끼고 돌아 동대문쪽에서 선회, 순종 임금님이 계신 창덕궁 상공으로 날아가 경의를 표한 다음 서울 시내를 일주하고, 기수를 북쪽에서 동쪽으로 바꾸고 손에 잡힐 듯이 낮게 여의도 비행장의 관중석을 스치고 지나가는 저공비행을 마지막으로 12시 40분, 이륙한 지 18분만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제2차 비행은 그날 오후 2시 30분부터 약 5분간 800m 상공에서 여러 가지 고등비행의 묘기를 펼쳐 관중들을 열광하게 하는 한편, “과학기술 발달에 힘쓰자”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5색 전단 1만장을 뿌리기도 했다.


또 안창남은 그후 13일 뒤인 12월 23일, 오후 4시부터 약 19분 동안 서울 상공을 4회 돌며 같은 내용의 전단을 뿌리고 광화문 상공에서 재주를 세 번 넘는 곡예비행을 했으며, 이어 4시 23분에는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인천을 방문하고 5시 5분에 되돌아왔다. 그후 안창남은 대구, 부산 등 대도시 방문비행을 계획했었으나 비행기의 상태와 날씨 관계로 취소하고 3일 후인 12월 26일 도쿄로 되돌아갔다.


이 모국방문비행 이후 “떴다 보아라 안창남”이란 속요가, “달린다 보아라 김복동”(자전거 선수)과 같이 1930년대 전반기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유행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뜻깊은 모국방문비행을 한 후 2년이 지난 1924년, 안창남은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는 공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조종사로서 독립운동에 참가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안창남은 할 수 없이 손문(孫文)이 주도하는 남방혁명군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의 우수한 조종기술을 인정받아 일약 육군준장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종사가 귀했던 중국에서 일본의 1등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비행경험이 풍부한 안창남이 우대받아 장군의 지위까지 오른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남방혁명군 소속이었던 안창남은 혁명의 제2단계인 북방작전이 성공하자 소속을 북방혁명군으로 바꾸고 항공사령관과 비행학교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30년 4월 8일, 산서성 타이위안(太原)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애석하게도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그리고 71년이 지난 2001년 8ㆍ15 광복절에 안창남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중국에 있을 때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하고 한국인 비행학교 설립을 위하여 노력했으며, 국내파견 공명단원들에게 자금 600원을 제공했다는 것이 뒤늦게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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