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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항공지식(일반)

안창남을 이어 계속되는 모국방문비행

by 호기심심풀이 2020.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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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남을 이어 계속되는 모국방문비행


안창남의 모국방문비행 대회가 있은 뒤, 크게 자극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하늘을 날아 보고자 하는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술을 연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학비 때문에 웬만한 재력이 없이는 그 꿈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1922년부터 1930년까지 그 사이 일본에 가서 조종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은 이기연(李基演), 이상태(李商泰), 신용욱(愼鏞頊), 서웅성(徐雄成), 김동업(金東業), 김영수(金永修)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1920대의 이들 일본 유학출신 조종사들이 조국에 기여한 것은, 금의환향 형식의 모국방문비행을 통해 우리 동포들에게 더 많은 항공지식을 보급시켜 과학기술 발전에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안창남에 이어 두 번째로 모국방문비행을 한 사람은 이기연이었다. 그는 우선 1923년 12월 서울에서, 1924년 2월에는 자기의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서, 그리고 1925년 4월에는 대전, 진주 등 주요도시를 순회비행하는 등 세 번에 걸쳐 시범비행을 실시했다. 그래서 이기연은 안창남 이상의 선풍적인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네 번째 모국방문비행으로 1927년 6월 1일, 경북 점촌상공에서 곡예비행을 하다 엔진고장으로 추락하여 애석하게도 사망하고 말았다. 이것이 1925년 6월 장덕창이 당한 추락사고에 이어 두 번째 사고였는데 사망사고로서는 우리 항공사상 제1호가 되었다. 이기연에 이어 세 번째로 모국방문비행을 한 사람은 전남 장흥출신의 이상태였다. 그는 1924년 2월, 이기연이 두 번째로 방문비행을 한 지 4일 뒤에 광주와 목포에서 비행대회를 가졌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재력이 풍부하면서도 뒤늦게 모국방문비행을 한 사람은 전북 고창 출신의 호남갑부의 아들 신용욱이었다. 그는 안창남보다 5년 뒤인 1927년 12월, 당시로서는 가장 성능이 좋은 아보로식 K형인 자가용 비행기 타이거호로 모국방문비행을 했다. 그래서 신용욱은 한국 최초의 자가용 비행기 소유자가 되었다.


<신용욱과 타이거호>


그후 모국방문비행을 제일 늦게 1939년 4월에 실시한 사람은 일본 나고야 비행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하고 대구 동촌 비행장에 “조선항공연구소”(비행학교)를 설립한 김영수였다.


한편 일본에서 조종사 자격을 취득한 이들은 1927년 12월, 도쿄에 모여 “조선비행사협회”를 결성하고 자주 모임을 갖고 친목단결을 도모하였으며, 학자금이 없어 비행기 공부를 못하는 후배들에게 학비를 지원해 주는 등 후배 양성에 전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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