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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데 한 번 읽어볼까!?/잡학

키예프 러시아 PART 2(블라지미르, 야로슬라프)

by 호기심심풀이 202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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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지미르의 러시아 확장

스파토슬라프가 죽은 후 약해져가던 키예프 러시아는 980년 초기부터 국력을 회복하였다. 스파토슬라프의 아들인 블라지미르가 정권을 잡자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블라지미르는 여자를 매우 좋아했는데, 7명의 아내를 거느렸고 첩을 800명정도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영토를 확장하고 통합하는 일에는 온 힘을 기울이는 군인, 행정가였다.


1000년경에 이르러서 키예프 러시아의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 다음가는 대국으로 성장했다. 블라지미르가 통치한 동안에 동슬라브족의 모든 부족을 통합했고, 12명의 아들이 있어 러시아의 주요도시마다 아들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다. 1015년 블라지미르가 죽자 형제들은 20년간 치열한 싸움을 했다. 형제 중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과 책을 많이 읽어 '지혜로운 자'라는 뜻의 별칭을 얻은 야로슬라프가 싸움을 평정하고 러시아의 대공이 되었다. 

<블라지미르>


야로슬라프

야로슬라프는 먼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외부로부터 러시아를 방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자신의 인척들을 유럽의 왕족 가문과 결혼시키는 혼인 정책을 사용했다. 문화적인 면으로도 많은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야로슬로프의 업적 중 뛰어난 것은 법전이다. '루스카아 프라우다'라고 불리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법전을 편찬했는데, 법률에 의거하여 육체적 고통을 가한다든가 사형에 처하는 따위의 조항은 가능한 적게 넣음으로써 중세의 법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온건하며 부드러운 법이었다. 그리고 물질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범죄보다는 재산에 대한 처벌이 강했는데,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약간의 벌금으로 끝나지만, 창고나 곳간에 불을 지른 자는 국외로 추방당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아버렸다. 그는 종교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통제하에 있는 키예프 러시아의 교회들을 그들의 통제하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렇듯 야로슬라프 시대에 키예프 러시아는 가장 찬란하게 번창하였고 강국이 되었다. 1054년 야로슬라프는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키예프 러시아의 쇠퇴

야로슬라프가 죽자 다시 정세는 혼란에 빠지고 그가 만든 상속제도로 인해 아들들과 야로슬로프 형제들 사이에서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야로슬라프 무드르이의 실제 후계자로 이자슬라프가 등장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새로운 유목민인 폴로베츠족이 키예프 러시아를 위협해 커다란 피해를 보았다. 주요 도시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고 주민들은 대항하기 위한 원정군을 조직하려했지만 그 힘이 강해질까 두려웠던 이자슬라프는 그들의 간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키예프 곳곳에서 혼란을 일으켰고 두려움을 느낀 이자슬로프는 도망을 가게 된다. 다시 폴로베츠족이 기예프를 공격해왔는데 이때를 틈타 이자슬라프가 폴란드 군대와 함께 키예프로 들어와 그들에게 형벌을 가했다. 도시 내의 수공업자들과 농촌의 소농민들은 대귀족, 상인들과 자주 싸웠으며 귀족들과 한편이 된 상인들은 도시 내에 있는 주민들을 이용했다. 이런 불만이 가득한 생활을 하고 있던 키예프 주민들은 다시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귀족, 부유한 상인들을 상대로 마구 약탈했고, 이에 겁먹은 귀족과 상인들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도망가게 되었고 키예프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에 주민들은 야로슬라프 무드르이의 손자인 블라지미르 모노마흐를 대공으로 결정하였다.


16살에 대공이 된 블라지미르 모노마흐는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샀으며 주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귀족들을 제압하여 내란을 종식시키고 러시아 최대의 적인 폴로베츠족과 싸워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어린나이에 대공이 된 그는 주민들의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였으며 현명하고 용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125년 그가 죽고 그 뒤를 이어갈 뛰어난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몇몇 독립공국으로 분열되었고, 결국 키예프는 러시아 수도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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