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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데 한 번 읽어볼까!?/잡학

Battle of the Bulge(벌지 전투)

by 호기심심풀이 2020.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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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the Bulge(벌지 전투)

(1944년 12월 16일 ~ 1945년 1월 25일)


제 2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 독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된 것을 가리켜 미군이 이름을 붙이게 됨.



배경

1944년 9월 4일 영국군은 벨기에 안트베르펜을 해방하였지만, 보급거점으로써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독일군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용가능을 위한 목적을 세우지 않았고, 보급선이 길어져 연합군의 진격은 정지되고 전선은 교착상태가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히틀러는 반격작전을 구상했다. 


작전시기는 아르덴 숲이 안개에 뒤덮이는 겨울.

연합군의 항공기에 의한 격렬한 폭격으로부터 부대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또한 독일군은 작전에 참가하는 전력으로 정예 사단을 준비했다. 하지만 새로 편성된 국민척탄병사단까지 투입시켜야 할 정도로 만족할 만한 군수품과 인원을 준비하지는 못했다. 처음부터 위험을 안고 있던 작전이었다.


연합군에서는 독일군 집결의 정보나 공세작전의 조후를 보고받았으나, 독일에게는 공세에 나설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했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9월 중순에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공격의 성공을 위해서는 3가지 요점이 요구되었다.

첫째, 공격은 완전히 기습이어야 한다.

둘째, 악천후여야 한다. 연합군의 제공권을 무효화시키고, 보급로를 확보해야 하는 점. 겨울중에서도 혹설기로 설정

셋째, 신속하게 진격해야 한다. 



이렇게 독일의 기습이 시작된다. 독일군의 부대 이동을 연합군은 확인하지 못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첩보부로부터 이전의 보고 '독일군은 말기상황에 다다라 공세에 나설 여력이 없다.'를 근거로 아르덴의 정세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르덴 방면에는 약체화된 부대를 배치하였다.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벨기에 아르덴 숲을 통과해 진격을 개시했다. 악천후로 인해 연합군은 항공기를 띄울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기습으로 인해 연합군은 전사 및 부상자가 속출하여 괴멸당하거나, 포로가 되거나, 포위되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기습은 최초 수일 동안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독일군은 여러 지역에서 달려온 미군의 강력한 저항을 만나 전진은 매우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각 전선의 진격속도에 차이가 있어서 속공에 성공한 부대가 포위당해 집중적인 반격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대응하는 데 수 일이 걸릴 것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이다. 연합군의 대응은 히틀러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랐다.


슈퇴서 작전

독일군은 연합군 점령지역 후방으로 공수부대를 강하시켜, 본 작전의 지원 및 연합군의 교란을 노리는 슈퇴서 작전을 계획했었지만, 악천후와 연료부족 때문에 하루 늦게 작전을 실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짙은 구름과 강한 눈보라를 헤치고 이륙했고, 그 결과 다수의 수송기가 예정된 코스를 벗어났다. 약 300명이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전력이 충분하지 못해 연합군에 대한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라이프 작전

오토 스코르체니 친위대 중령이 이끄는 부대로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병사들이 연합군의 차량과 연합군의 것으로 위장한 차량을 사용하여 적 후방으로 침입했다. 제대로 영어를 구사하고 후방으로 침투 가능한 병사는 20여 명 정도였지만 이 부대의 존재는 그 이상의 혼란을 발생시켰다.

몇 명의 병사가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이미 각오를 다신 그들은 최후까지 거짓자백을 하여 연합군에게 혼란을 주었다. 그 결과, 후방지역의 여러 곳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병력과 장비의 이동이 정체되었다. 


연합군의 반격

12월 23일 날씨가 회복되면서 연합군은 공중폭격과 공중보급을 시작했다. 

12월 24일 보급선의 한계를 넘어선 독일군의 진격은 속력을 잃었다. 연료와 탄약이 고갈되었고, 연합군의 정보부는 손쉽게 독일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적절한 반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월 23일에는 독일군 사령부에 의해 작전중지가 결정되었다. 전투는 공식적으로 1945년 1월 27일 종료되었다.


미국의 공을 가로채려 한 몽고메리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치열하게 단일 전투를 벌인 미군은 악조건 속에서도 용감하게 반격하며 맹렬한 기세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1945년 1월 7일 정작 기자회견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은 영국의 육군 원수 버나드 로 몽고메리였다.


몽고메리는 연합군에 대한 임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려 하지 않았다. 조지 S. 패튼 장군은 "몽고메리는 별 볼 일 없는 멍청한 인간이다. 전쟁에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인데 이 자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자신의 일기장에 심정을 표현했다. 몽고메리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미군을 구한 것은 영국이라는 식으로까지 말하며 실제로 대부분의 전투를 담당했던 미군의 머리를 거만하게 쓰다듬었다. 역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즈에 따르면 "몽고메리는 '미군은 제대로 된 리더가 있어야 훌륭한 병사가 된다'고 말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과거에도 비슷한 전쟁을 겪어봤지만 이번만큼 고통과 근심을 안겨준 사건은 없었다"라고 적었다.

화합하는 연합군의 모습을 복원하는 과업은 윈스턴 처칠에게 남겨졌다. 이 영국 총리는 몽고메리의 대참사가 있은 지 11일 후 하원 앞에서 연설을 하면서 그의 모든 웅변술을 동원해 진정한 영웅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했다.


"우리 병사 한 명이 투입되었을 때 미국 병사는 30~40명이 투입되었고 우리 병사 한 명이 부상당했을 때 미국 병사는 60~8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명예를 독차지하려는 몽고메리를 직접 겨냥한 듯한 발언을 했다. "우리군은 자랑스러운 과업을 말할 때는 남의 공을 부당하게 가로채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번 전투는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이 치른 가장 훌륭한 전투였고 아마도 미군이 승리한 가장 유명한 전투로 평가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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